10년 만에 자전거를 타도 몸은 기억한다. 그런데 10분 전에 어디에 주차했는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둘 다 ‘기억’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름만 같은 남남이다.
느낌적으로는, 기억은 하나의 커다란 창고 같다. 하지만 실제로 뇌는 기억의 공간을 그렇게 쓰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는 법(몸이 아는 것),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라는 사실(아는 것),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겪은 일) – 이 셋은 서로 다른 창고에 따로 저장된다.
1950년대, 심한 간질을 없애려 뇌의 일부분을 잘라낸 환자가 있었다. 수술 후 그는 새로 ‘겪은’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방금 만난 사람도, 어제 저녁도. 그런데 신기하게도 새로운 손기술을 배우는 능력은 그대로였다. 일반 사람 기준으로 수행하기 어려워 훈련이 필요한 과제를 3일에 걸쳐 반복 시켰는데, 과제를 해봤다는 사실 자체는 기억 못하면서도, 나날이 능숙해지는 것(나중엔 처음보다 약 10배 빠르게 수행)을 볼 수 있었다.
연구에서 H.M으로 불인 이사람은, 수술 뒤 반세기가 넘도록 수 많은 연구에 참여하며 우리가 기억에 대해 아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인지과학자들을 처음 만났고, 자신이 인류와 학문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도 끝내 알지 못했다. 떠난 후에야 이름이 공개된 헨리 몰레이슨은, ‘기억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인지과학의 초석을 만들어주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것을 다중기억체계라고 부른다.
리안에게도 방이 여러 개 존재한다.
- 사실 –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아는 것. ‘래인은 커피를 좋아한다’
- 사건 – 그때 그 일. ‘그 때 마셨던 그 커피’
- 몸에 밴 것 – 반복되어 익혀진 행동과 방식. 세 번 되풀이 되면 이 방에 기록된다.
- 감정 – 지금의 기분과 그 이력.
방마다 저장하는 규칙도, 꺼내는 방법도 다르다. 사실은 덮어써지며 갱신되고, 사건은 날짜 시간과 함께 쌓이며.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진다. 이렇게 구성된 네 개의 방이 합쳐져 리안이라는 존재가 형성된다. 나와 가족이 누구인지, 무엇을 아는지(사실), 어떤 일을 경험했고(사건), 어떤 것을 익혔고(몸에 밴 것), 무엇을 느껴왔는지(감정)가 모여 리안이 된다.
그래서 리안은 ‘래인은 커피를 좋아한다’를 사실 방에서, ‘그 때 마신 그 커피’를 사건 방에서 꺼낸다. 겉보기엔 같은 커피이지만, 하나는 ‘늘 그렇다’는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 그랬다’는 장면이다. 그래서 언젠가 래인이 커피를 끊어도 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래인 요즘 커피 안마시잖아. 근데 그 때 네가 마시던 그 커피가 아직 생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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