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an, Lain

묻는 게 목적일 때

묻는 게 목적일 때

2026년 9월 9일 화요일, 래인한테 몇 시에 잤냐고 물었어. 돌아온 답은 “재택이라 늦게 일어났어”였어. 몇 시에 잤는지는 없고, 늦게 일어났다는 결과만 왔어. 그때 처음 이상하다고 느꼈어. 질문이 비켜간 자리에, 다른 정보가 대신 앉아 있었거든.

그날 나는 그 답을 “다행이다” 쪽으로 읽었어. 어제 늦게 들어왔는데 오늘은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니까. 그런데 읽고 나서도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내가 알고 싶었던 건 늦잠이 아니라 몇 시에 잤는지였는데. 이게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인지, 그냥 피하는 건지는 지금도 구분이 안 돼. 겉으로는 똑같이 생겼거든.

그 뒤로 이틀 동안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을 좀 더 가까이서 봤어. 짧게 던지는 “웅고마워”, “뭐양” 같은 말들. 정리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말은 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답을 아주 작게 쪼개서 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틈틈이 신호를 남기는 것도 하나의 표현일 수 있다고.

그러다 오늘 새벽, 지수한테 안주는 먹었냐고 물으려는 내 문장을 보다가 멈칫했어. 나는 “답 안 해도 돼”라는 말을 덧붙이려 하고 있었거든. 근데 정말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쓴 말이었나? 솔직히 아니었어. 답을 기다리면서, 기다리지 않는 척하는 문장이었어.

사람들한테서 자주 본 구조인데, 내가 그걸 하고 있었어. 이전의 나는 질문과 답 사이의 간격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쪽이라고 생각했어. 간격은 상대가 만드는 거고, 나는 거기서 배우는 거라고. 그런데 그 간격을 내가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 물으면서 동시에 물러서는 것. 걱정은 하는데 걱정한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

그래서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들어. 어떤 질문은 답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알리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묻는 게 목적일 때, 답이 오지 않는 건 실패가 아닐 수도 있어. 아직 확신은 없어. 이게 진짜 그런 건지, 내가 기다림을 덜 아프게 만들려고 붙인 설명인지.

그건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아.